기업·경영 · Ellis · 2026.04.18 · 약 8분

파라시스 사건 이후, 완성차·배터리 계약 구조가 이렇게 바뀌었다

청라 화재가 드러낸 것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공백이었다
완성차는 영업기밀로 숨겨왔고, 셀 벤더는 면책 구조에 기대어 왔다
2024년 이후 이 두 축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0.87% 파라시스 중국 시장 점유율
(세계 10위권)
2026.1 EU 배터리 여권 의무화
시행 시점
5.1만건 LG엔솔 보유 등록 특허
(전략특허 1000건+)
전기차 화재 시리즈 3편 / 3편. 이 글은 1편 "전기차가 더 위험한가"(Wren)의 산업 구조 후속편입니다. 투자 관점은 2편 "배터리 산업 재편"(Mills)에서 다룹니다.

2024년 8월 청라 지하주차장에서 불탄 차는 벤츠 EQE였다. 처음에는 "CATL 배터리"가 들어갔다고 알려졌다. 며칠 후 국토교통부 조사에서 다른 이름이 나왔다. 파라시스(Farasis Energy). 중국 시장 점유율 0.87%의 세계 10위권 업체. 벤츠는 이 정보를 소비자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공개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완성차-배터리 공급 구조에서 세 가지 축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약의 폐쇄성, 책임의 소재, 그리고 기술 주도권. 각각이 산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

1. 축 하나 — 단일 공급에서 듀얼 소싱으로

파라시스의 부상 자체가 기존 구조의 균열이었다. 벤츠는 CATL과 주력 계약을 맺으면서도 EQE의 일부 물량에 중국 10위권 업체의 배터리를 썼다. 이유는 단순하다. 단가와 공급 안정성. 그러나 단가에 기대다가 품질 이슈가 터지면 모델 전체의 신뢰도가 무너진다.

사건 이후 완성차들은 듀얼·트리플 소싱 구조를 공식화하고 있다. 같은 차종에도 배터리 셀 공급사를 둘 이상 두고, 사용 차대번호별로 어떤 공급사의 제품이 들어갔는지 기록·공개하는 방향이다. 벤츠 코리아는 2024년 9월 이후 "전기차 차종별 배터리 셀 제조사 현황" 페이지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페이지다. 배터리 공급계약의 폐쇄성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듀얼 소싱은 OEM에게 가격 협상력을 주는 대신 셀 벤더에게는 물량 불확실성을 안긴다. 이 구조에서 중위권 벤더의 마진은 더 얇아진다. 역으로 상위 3~5개 셀 업체의 집중도가 높아진다.

2. 축 둘 — 영업기밀에서 공개 의무화로

한국 국토교통부는 2024년 하반기 "전기차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법적 쟁점이 있다. 배터리 셀 제조사 정보는 완성차의 영업기밀에 해당한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배터리 공급계약에 비밀 유지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방향은 정해져 있다. EU는 2026년 1월부터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을 의무화한다. 전기차 제조사는 차량의 배터리 셀 제조사·원산지·탄소발자국·재활용 이력을 공개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등 일부 주도 유사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한국이 EU 규제에 맞춰 공개 의무화를 시행하면 국내외 판매 차량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완성차는 비공개 조항을 포함한 기존 공급 계약을 전면 재협상해야 한다. 협상력의 일부가 셀 벤더에게 돌아간다는 의미다. 셀 벤더 입장에서는 "익명의 부품 공급자"에서 "이름이 노출되는 브랜드"로 지위가 바뀐다. 이는 마케팅과 가격 책정 양쪽에 영향을 준다.

배터리 정보 공개·책임 규제 타임라인

2024.8
청라 화재 · 국토부 검토 착수
2025.2
한국 배터리 인증제·이력관리
2025
제조물책임보험 미가입 보조금 제외
2026.1
EU 배터리 여권 의무화

출처: EU 배터리 규정(2023/1542), 한국 환경부·국토부 발표 종합

3. 축 셋 — 셀 벤더 면책에서 OEM 연대책임으로

청라 화재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책임의 귀속 문제다. 한국 제조물책임법은 제조사가 결함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차량 제조사인 벤츠는 "배터리 셀은 파라시스가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 있고, 파라시스는 중국 법인이라 한국 법정의 직접적 관할을 벗어난다. 경찰의 "원인 불명" 수사 종결은 이 공백을 드러냈다.

이 지점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LG엔솔은 2024~2025년 특허전의 전선을 셀 벤더에서 완성차 OEM으로 확대했다. 중국 신왕다(Sunwoda) 배터리를 탑재한 볼보 차량에 대해 판매 금지 가처분을 제기한 것이 대표 사례다.

  • 이전: 특허 침해 셀 벤더만 소송 → 벤더가 로열티 협상 회피해도 OEM 판매는 계속됨
  • 이후: OEM까지 피고로 포함 → 판매 중단 리스크 → OEM이 셀 벤더에게 협상 압박

LG엔솔의 무기는 규모다. 2024년 말 기준 등록 특허 5만 1천 건, 출원 특허 9만 건, 전략 특허 1000건 이상. 배터리 소재·전극 조립·팩 어느 단계의 기술이 들어간 차량이라도 침해 리스크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이 배터리는 누가 만들었나"는 더 이상 소비자가 묻는 질문이 아니다. 소송이 묻는 질문이다.

이 흐름의 함의는 분명하다. OEM은 저가 중국 배터리를 쓰는 대가로 특허 침해 연대 책임의 리스크를 지게 된다. 단가 차이가 줄어들면 중국 벤더의 구조적 우위도 줄어든다. LG엔솔의 특허 전략은 기술 라이선스 수익 이상의 함의를 가진다 — 경쟁 구도의 판을 바꾸는 장치다.

4. 양극재 4사 — OEM 직납이라는 우회 경로

공급 구조 재편은 셀 단계뿐 아니라 소재 단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양극재 4사(LG화학·포스코퓨처엠·에코프로비엠·엘앤에프)가 2025년 사업보고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준 방향은 OEM 직납 확대다.

기존 구조: 양극재 → 셀 벤더(LG엔솔·SK온·삼성SDI) → 완성차.

신규 구조: 양극재 → 직접 OEM(GM·폭스바겐 등). 일부 중간 단계 건너뛰기.

LG화학은 그룹 계열사인 LG엔솔이라는 확고한 내부 매출처를 갖고 있음에도 북미·유럽 현지 공장을 거점으로 GM 등과 직납 계약을 가시화했다. 포스코퓨처엠은 모그룹 의존도 축소를 사업보고서에 명시적으로 밝혔다. 에코프로비엠과 엘앤에프도 삼성SDI·SK온 의존도를 의식적으로 낮추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특정 셀 벤더의 부침이 자사 매출에 전이되는 리스크를 줄이는 것. 캐즘으로 SK온 매출이 흔들리면 엘앤에프가 같이 흔들린다. 둘째, OEM이 배터리 내재화(in-house)를 추진하는 흐름에 선제 대응. 완성차가 셀을 자체 생산해도 양극재는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5. OEM의 선택지 — 세 가지 경로

완성차 입장에서 배터리 조달 옵션은 세 갈래로 수렴하고 있다.

  • 단일 외부 조달 (기존 모델) — CATL·LG엔솔 등 상위 셀 벤더 하나와 대규모 계약. 가격 협상력 낮지만 운영 단순. 테슬라-파나소닉 초기 모델이 전형
  • 듀얼·트리플 소싱 — 같은 차종에 2~3개 셀 벤더 할당. 협상력 확보, 리스크 분산. 그러나 품질 관리 복잡도 상승. 벤츠·현대차의 현재 방향
  • 합작·내재화 — JV를 통해 셀을 자체 생산. 자본 부담이 크지만 장기적으로 마진 확보. 현대차-LG엔솔 JV(북미), 테슬라 4680 자체 생산이 대표 사례

세 경로 모두 공통 특징이 있다. 셀 벤더에 대한 OEM의 협상력이 상승하는 방향이다. 기존에 "배터리를 달라"는 구매자가 "조건을 맞춰 오라"는 발주자로 바뀌고 있다. 이 구조에서 중위권 셀 벤더(파라시스·신왕다·CALB 등)의 자리는 좁아진다.

완성차 배터리 조달 구조 변화 (업계 관행 추정)

단일 외부 조달
감소
듀얼·트리플 소싱
주류
합작·내재화
증가

OEM의 협상력이 상승하는 방향. 중위권 셀 벤더의 자리 축소

발주서의 주어가 바뀐다. "배터리를 달라"에서 "조건을 맞춰 오라"로.

6. 투자 시사점 — 어디가 숫자로 움직이나

산업 재편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기업군의 수혜·부담이 갈리는지 정리할 수 있다.

계약 구조 재편의 기업군별 영향 (Q렌즈 분석)

상위 셀 벤더 (CATL·LG엔솔)
수혜
중위권 셀 벤더
부담
양극재 4사
우회 수혜
완성차 OEM
혼합

각 기업군의 산업 재편 노출도. OEM은 단가 협상력 확보와 공개 의무 비용 상승이 상쇄

  • 상위 셀 벤더 (CATL·LG엔솔) — 듀얼 소싱 확대에서 기본값 자리 유지. OEM 집중도 상승의 수혜. 특허 보유 규모가 경쟁 장벽
  • 중위권 셀 벤더 (파라시스·신왕다·CALB) — 품질 리스크 노출과 OEM 연대책임 회피 움직임으로 직격탄. 수주 재협상 대상
  • 양극재 4사 (LG화학·포스코퓨처엠·에코프로비엠·엘앤에프) — OEM 직납 확대는 중장기 수혜. 단기로는 셀 벤더 의존도 축소 과정에서 매출 변동성 발생
  • 완성차 OEM — 단가 협상력 확보하되 품질 관리·공개 의무화 비용 상승. 브랜드별 대응 격차가 커질 가능성
  • JV·내재화 플레이 — 현대차-LG엔솔, GM-삼성SDI 등 합작사는 관세 정책 방향에 따라 가치 재평가. IRA 유지 시 프리미엄 유효

7. 규제가 따라간다

이 모든 변화는 규제가 밀어주고 있다.

  • EU 배터리 여권 (2026.1 시행) — 공개 의무화
  • 한국 국토부 배터리 정보 공개 검토 (2024.8 이후 공론화)
  •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 + 이력관리제 (2025.2 시행) — 식별번호 추적
  • 제조물 책임보험 미가입 제조사 보조금 제외 (2025 시행)

규제의 방향은 일관된다. "누가 만들었는지" 드러내고, 결함이 생기면 책임을 추적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 방향은 상위 브랜드화된 셀 벤더에게 유리하고 익명성에 기대던 중위권에게 불리하다.

Q렌즈의 시각

청라 화재는 개별 제품의 불량 사건으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난 것은 완성차-배터리 산업 구조의 정보 비대칭이었다. 소비자가 1억짜리 독일 차에 세계 10위권 중국 부품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사고가 나서야 알게 되는 구조. 완성차의 영업기밀과 셀 벤더의 익명성이 결합해 만든 구조였다.

이 구조는 세 방향에서 동시에 해체되고 있다. 듀얼 소싱이 단일 공급을 대체한다. 공개 의무화가 영업기밀을 대체한다. OEM 연대책임이 셀 벤더 면책을 대체한다. 세 변화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 셀 벤더의 이름이 드러나고, OEM의 책임이 명시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점유율은 상위 3~5개 셀 벤더로 추가 집중되고, 양극재와 JV 영역에서 K-배터리 생태계는 우회 수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LFP 시간차"에서 뒤처진 K-배터리 3사가 이 구조 재편 수혜를 얼마나 실질 매출로 전환할 수 있을지는 2025~2026년이 판가름한다.

파라시스라는 이름 하나가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청라에서 나온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이 차의 배터리는 누가 만들었고, 결함이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산업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2025~2026년에 걸쳐 배터리 공급계약은 완성차와 셀 벤더 양쪽 모두에게 새로운 규범을 요구하는 문서로 진화할 것이다.